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바느질과 한국 고대 복식

삼국시대부터 한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바느질과 관련된 누에를 돌보고, 실을 잣고, 자수하는 양잠과 바느질 일은 여성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삼국시대의 한국 의복을 책임졌던 누에와 양잠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시대 역사서 속 양잠과 옷 짓기

양잠에 대한 기록은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리왕(재위 24~57) 때 방직을 위해 전국 6개 구역을 2개의 구로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잠에 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왕실의 공주나 왕비 등은 직접 이 일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양잠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각 구의 여성들은 직접 공주의 인도를 받아 이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7월 16일부터 2개 구역이 매일 마을 뜰에 모여서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실을 엮었다. 8월 15일에는 두 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고, 이 평가에서 패한 팀은 승자를 축하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

양잠과 방직, 방적 등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삼국시대(BC 57~AD 668)에 양잠업, 직조, 자수 기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신라의 21대 임금인 소지왕(479~500) 때, 신라의 평민들은 화려한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당나라와 수교를 시작한 진덕여왕(재위 647~654)은 태평송(大平歌)이라는 시를 짓고 비단에 시를 수 놓았는데 이는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 옷감 제작과 재단, 봉제, 장식이 여성의 몫이었다는 사실은 조용석(1686~1761)과 김씨의 풍속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홍도(1745~1818년 이전)는 방적, 직조, 봉제, 자수 등의 활동을 하던 18세기 여성을 대표합니다. 정조(재위 1726~1800)의 어머니 홍부인은 회고록 『한중록』에 자신의 어머니가 가족의 소비를 위해 면직물을 엮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해 바느질도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조선시대 양잠, 바느질, 자수에 대한 기록

조선시대 양잠과 방적이 한국 여성들의 일상적인 일이었다면, 바느질과 자수는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유명한 여화가이자 시인인 신사임당부인(1504-1551)은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어머니 옆에 앉아서 함께 바느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조선시대 여인들에게는 7명의 가까운 동료가 있었다고 일컬어집니다. 그 7명의 동료는 바로 자, 가위, 바늘, 실, 골무, 작은 쇠,긴 나무 손잡이(인두, 화로의 재 속에 보관된 좁고 긴 삼각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반 철(다리미, 뜨거운 숯을 담는 평평한 바닥 그릇)을 말합니다. 이 다리미는 큰 천 조각이나 조각을 누르는 데 사용 되었습니다.

손가락 보호를 위해 손가락 끝에 끼우던 골무
손가락 보호를 위해 손가락 끝에 끼우던 골무

조선시대 의복

전체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이 7명의 동행자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어느 익명의 여류작가가 쓴 『바늘에 대한 애도』라는 수필에서도 확인할 수있습니다. 평생 함께 할 것이라고 믿었던 바늘이 안타깝게도 어느 날 고장이 나게 되자 이 여류작가는 완전히 망가진 바늘을 가지고 수필을 작성합니다.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내 바늘이여, 얼마나 불쌍한가! 당신은 철기 중에서 눈에 띄는, 평범하지 않은, 좋은 품질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편협한 기사처럼 능숙하고 날렵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곧고 진실하며, 날카로운 끝은 말하는 것 같았고, 둥근 눈은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두꺼운 비단이나 얇은 비단에 봉황과 공작새를 수 놓았을 때, 당신의 놀랍도록 민첩한 움직임은 마치 영혼의 작용처럼 보였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당신과 맞먹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한국인들의 복장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만주와 한국 북부 지역에 살았던 고대 한국인들은 소매가 크고 바지가 긴 가운을 입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흰색 옷을 선호했지만, 공개 모임이나 해외 여행 등 특별한 경우에는 비단 양단과 수 놓은 천을 입었습니다.

실제로 4~7세기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넉넉한 소매와 바지가 달린 가운을 입은 남성과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춤추는 장면에서 무용수 묘실의 주조 벽에서 남자들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V넥 튜닉이나 소매가 넉넉한 상의를 입고 있습니다. 같은 무덤에서 발견된 서벽의 사냥 장면은 말을 타기에 편리하고 외부 활동을 하기에 용이한 소매가 잘 맞는 상의를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덕흥리 고분 벽화
덕흥리 고분 벽화

여성과 남성 모두 발목에서 묶는 형태의 바지를 입었습니다. 다만, 여성들은 바지 위에 발목 길이나 혹은 바닥에 닿는 길이의 플리츠 스커트를 입었던 것이 남성과의 차이입니다. 남성들의 상의 길이가 유니폼처럼 모두 유사했던 것과 달리 여성들의 상의는 길이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무덤 벽화에서 발견된 여성 무용수들의 V넥 상의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한편, 동쪽 벽화에서 발견된 여성들은 허리 약간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였습니다. 여성 무용수들의 옷 밑단과 네크라인, 그리고 소매의 끝에는 자수로 장식되었습니다.

각저총 고분 벽화
각저총 고분 벽화

647년, 진덕여왕 원년(647~654), 무열왕(재위 654~661)이 된 김춘추는 신라 궁중 남자들의 복식으로 중국 남자들의 관복인 당(Tang)나라 스타일을 채택했습니다. 665년에는 당나라 여성복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7세기 후반에 한국 여성복식은 당풍(唐風)을 따라 변형된 것으로 보입니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중국복식은 한국의 관복과 왕실복식에 영향을 미쳤지만, 일반 한국인의 복식은 더욱 변함없이 유지되어 한복, 즉 치마와 저고리라고 불리는 한국 전통복식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치마와 저고리(스커트와 블라우스 또는 재킷) 조합, 그리고 남성의 경우 바지와 저고리(바지와 재킷) 조합이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