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패션 역사: 사회적 배경과 패션의 변화

1950년대 패션

1. 1950년대 사회적 배경

 

냉전시대의 우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에 끝난 후,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냉전이 이어졌다. 두 정치 체제 간의 경쟁은 우주 개발을 주도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우주 프로그램 대결로 상징되었다. 1957년 소련은 먼저 지구를 도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고,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을 첫 우주인으로 탄생시키며 기선을 제압했다. 그리고 8년 후 미국의 닐 암스트롱(Niel Armstrong)은 달에 첫발을 디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우주 시대의 파장은 실로 대단했으며, 과학, 우주여행, 공상 과학 소설 등이 당시 모든 소비를 발생시키는 기본 개념이 되었다.

1954년 미국에서는 7명 중 1명이 개인 TV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TV 광고는 새로운 소비 시대에 대중을 자극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신용 카드 제도가 도입된 것도 이때이다.

1947년 추상표현주의의 산물인 액션 페인팅 양식을 완성한 작가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이 1950년대 미술계를 주도하고 1956년 사망할 무렵, 같은 해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는 영화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통해 스타덤에 오르며 젊은이들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2. 1950년대 패션의 양식과 흐름

 

1950년대 초 디올(Dior)의 뉴룩 스타일은 1947년 이후 지속적으로 유행의 선두에 서 있었다. 하지만 패션계의 주도권이 디올에게 넘어간 것에 분노하며 다시 복귀한 71세의 샤넬(Chanel)과 루즈 웨이스트(loose waist) 실루엣을 소개한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열정이 이 시기 초 패션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1957년 디올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21세의 신예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디올 하우스의 수장이 되었으며, 메리 퀀트(Mary Quant)는 미니스커트를 처음 선보이며 다가올 1960년대의 폭풍을 예견했다.

2.1. 여성복의 변화

 

여성복의 두드러진 변화는 이전 시대 할리우드 스타들을 통해 이미 세련된 스타일로 바지의 착용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남녀의 동등한 지위가 인정되면서 바지는 캐주얼웨어뿐 아니라 정장으로까지 선호되어 새로운 유행 스타일을 만들었다. 20세기 초 현대적 여성 스타일이 도래한 지 50년 만에, 19세기 중반 블루머의 착용이 허용된 지 100년 만에 바지는 여성복의 보편적 아이템으로 인정받았다. 1951년 리바이스의 캐주얼 데님이 등장하면서 바지 선호 현상은 더욱 확산되었다.

2.2. 남성복의 변화

 

남성복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회색 플란넬 수트가 널리 착용되었으며, 반면 젊은 청년들은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들의 부모 세대와는 다른 스타일을 착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귀족적인 에드워디안 복식을 모방한 테디 보이(Teddy Boy) 스타일이 영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과격한 로커(Rocker) 스타일도 고개를 들었다.

3. 패션 시스템의 변화: 쿠튀르에서 대량 생산으로

 

대량 생산 방식을 통한 글로벌 패션 시장의 위력은 20세기 후반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도약을 계기로 그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 획기적 시스템은 이미 1950년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900년대 폴 푸아레 이후 50년 동안 두 차례의 전쟁과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패션계는 기능적이며 획일화 된 의상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패션 산업 패턴은 직업이 있는 중산층들의 구매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시작해다. 그리고 그 해답은 ‘기성품’이었다.

1950년대 이전 쿠튀르 종사자들은 스스로 대중 혹은 개인들의 룩을 결정하는 특권을 물려받았다고 여겨왔으나 이 시기 이들은 이미 일반 대중과 시대정신에 발맞춘 의류인 ‘프레타 포르테’와 만남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대규모 백화점들의 적극적 판매 마케팅과 이들이 창출해내는 이윤의 규모는 쿠튀르들을 압박했고, 1950년대 말 프랑스 여성의 25퍼센트가 대량 생산된 의류를 구매하게 되었다. 아직 파리는 크리스찬 디올 컬렉션과 그로 인한 쿠튀르 업계의 호황으로 유력 인사, 영화배우, 세계 각국 부자 상속녀들의 후원을 받아 파리지엔 럭셔리 패션의 특권을 이어나갔다.

쿠튀르의 정통성, 글래서, 명성 등이 함축된 디자이너 향수는 하우스에 확실한 이익을 제공할 제품 다양화 방편의 일환이었다. 1950년대에 나온 수많은 향수는 장기적 시장 존속을 유지해 줄 보증 수표로 여겨지며 쿠튀르 하우스의 철저한 검증 속에서 출시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의 출현에 발맞추어 쿠튀르들은 수입의 원천인 향수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 자체 자본을 투자하여 큰 화장품 그룹으로 키우는 방식 혹은 라이센스 제조 방식 등을 도입했으며, 의류를 제외한 액세서리 중심으로 대량 생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초창기 쿠튀르들은 ‘메이드 인 프랑스’를 전제로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업체만을 선별하여 합당한 품질을 보장하는 제품을 내보낼 것을 약속했다. 이들은 외주 라이센스를 통해 구두, 가죽 제품, 안경, 주얼리, 시계처럼 나름의 전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공방을 선정하여 쿠튀르의 이름 사용권을 허용했다. 1850년대를 기점으로 동시에 출발한 주문복과 기성복은 비록 안타깝게도 100년이 지나 모든 면에서 축의 반대편에 서 있는 서로를 발견했으나, 멋진 의상을 갈구하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이 시점에 각기 다른 이유로 공조에 합의하고 있었다.

4. 유스 패션(Youth Fashion)의 태동

 

해방과 함께 태어난 수많은 전후 세대들은 그들 나름의 자연 발생적 음악과 생활 방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연출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경제 공황을 겪으며 유급 휴가를 얻어낸 1930년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이러한 환경은 레저 패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젊은 세대들은 숙련된 기능공들이 만든 새로운 고급 산업 제품들을 구입하며 패션 소비 시장에서 그들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이들은 1950년대의 관념과 소비 패턴, 패션의 형식을 주도하기 시작했으며, 전쟁 종식으로 자유를 찾은 보수적 패션 제국 프랑스는 낙관적 분위기로 이 새로운 움직임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것은 자유로운 거리 패션, 곧 젊음의 상징이 스트리트 패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개방적인 이들의 패션은 더 이상 유명 쿠튀르 하우스에서 나올 필요가 없었으며, 이러한 환경은 하위문화의 상위문화 진입을 허용한 1970년대를 예견하며 서서히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4.1. 테디 보이와 모즈 룩

 

영국에서는 테디 보이와 모즈(Mods)가 상반된 이념을 바탕으로 유행을 주도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10대 청소년들을 패션 아이콘으로 등극시킨 테디 보이는 이전 시대부터 유지되어 온 엄격한 영국의 계급 제도에 대한 반항 의식을 드러냈다. 하류층 백인들로 구성된 이 집단은 의식적으로 의복에 신경을 썼으며, 상류층에 대한 동경과 자신들의 열등감을 에드워디안 시대의 의복을 모방하며 표출했다. 모더니스트의 준말인 모즈는 테디보이와 달리 과장을 거부하고 정돈된 스타일을 통해 세련미를 선보였으며, 레저와 문화에 관심 있는 자신들의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모즈 룩의 대표로 ‘비틀즈’를 꼽을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영국 패션 제조업자들이 노스탤지어를 자극한 에드워디안 엘레강스를 부활시켜 보수주의자들을 겨냥한 몸에 밀착하는 레트로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역설적으로 상류층 도시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내놓은 이 스타일은 ‘귀족을 위한 테이 보이룩’으로 여겨지며 인기를 누렸다는 점이다.

4.2. 비트닉 룩과 로큰롤 룩

 

뉴욕의 우울한 백인 중류 계층의 문화 이탈적 감성을 표현한 비트닉 룩(Beatnik look)과 페티코트를 받쳐 입는 서큘러 스커트에 진, 스웨터, 슬립온 슈즈로 착장된 로큰롤 세대의 의상들이 새로운 칼리지 룩으로 명명되며 1950년대 미국적 스타일을 세계에 알렸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친숙해진 로큰롤은 제임스 딘과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영화들의 인기에 힘입어 로커(Rocker) 스타일로 재탄생되었다. 자신의 신분을 반항적으로 표현하는 이 자유주의자들은 모터사이클을 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에 진과 검정 가죽 재킷으로 스타일을 마무리하며 이 스타일을 젊은이들의 새로운 유니폼으로 만들었다.  반면 잭 케루악(Jack Keruac)이 1948년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비주류 세력을 지칭한 ‘비트세대(Beat Generation)’는 소설가 존 클레론 홈스(John Clellon Holmes)가 1952년 이를 뉴욕타임즈에 소개하면서 대중에게 다가갔다. 주류문화에 대항하는 저항자라기 보다는 ‘문화적 이탈자’인 비트들은 절망과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백인 중산층이 하위문화에 유입되면서 확산되었고, 실존주의적 가치와 예술 취향을 접목한 독창적 문화코드를 만들며 자신들이 세계주의자(Cosmopolitan)임을 자청했다. 비트들은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한 폭력영화나 풍자만화에 심취했는데 이 미디어들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이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린 비트닉 룩이다.